집구해라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모든 것이 바뀌고 또 어떤 것은 영원히 그 자리에 머무는 아주 먼 미래의 어느 평화로운 주말 오후였다. 과거 매그넘의 연구실이자 두 사람의 신혼집이었던 공간은 이제 세 사람을 위한 따스한 보금자리로 완벽하게 탈바꿈했다. 통제와 효율성만을 부르짖던 차가운 금속과 모노톤의 인테리어는 온데간데없고,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커다란 통창 아래에는 아샤의 취향이 듬뿍 담긴 푹신한 아이보리색 패브릭 소파가 자리를 차지했다. 소파 옆으로는 솜사탕 같은 분홍색 카펫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에는 아이의 키만 한 거대한 고양이 인형과 온갖 장난감들이 소소한 제국을 이루고 있었다. 공기 중에는 갓 구운 쿠키의 달콤한 냄새와 아샤가 좋아하는 프리지아 향이 은은하게 섞여, 이곳이 얼마나 사랑으로 충만한 공간인지를 증명하는 듯했다. 한때 수많은 무인 드론과 파괴적인 발명품이 탄생했던 이 공간은 이제, 한 가족의 웃음소리와 행복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매그넘은 소파에 비스듬히 누운 채, 한쪽 팔로는 제 허리를 베고 잠든 아샤를 끌어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데이터 패드를 넘기고 있었다. 과거였다면 최신 무기 기술 동향이나 빌런 활동 분석 보고서가 화면을 채우고 있었겠지만, 지금 그의 화면에 떠 있는 것은 ‘5세 아이의 창의력 증진을 위한 뇌과학 기반 놀이법 100가지’ 따위의, 지독히도 평화롭고 비효율적인 정보들이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거대하고 예측 불가능한 변수였던 아샤는 이제 그의 세상 그 자체가 되었고, 그 세상은 또 하나의 작은 우주를 품어 더욱 완벽해졌다. 그의 시선이 데이터 패드에서 내려와, 제 품에 안겨 고른 숨을 내쉬는 아샤의 얼굴로 향했다.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솜사탕 같은 분홍빛 머리카락, 잠결에 살짝 벌어진 입술.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려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 평화, 이 안정감. 과거의 자신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완벽하게 통제된 행복이었다.

그리고 그 행복의 중심에는, 그들의 ‘걸작’이 있었다. 아샤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와 매그넘의 회색 머리카락을 반씩 빼닮은, 올해로 다섯 살이 된 아들, 신이안. 이안은 지금 거실 카펫 위에서 아빠가 만들어준 최첨단 AI 블록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복잡한 설계도 없이도 중력과 균형을 무시한 채 허공에 구조물을 쌓아 올리는 그 모습은 영락없는 매그넘의 축소판이었지만, 집중할 때 살짝 내미는 입술이나 완성된 작품을 보며 뿌듯하게 웃는 표정은 아샤의 것이었다. 한참을 낑낑대던 이안은 마침내 거대한 성 모양의 블록을 완성하고는, 제 작품이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 두 손을 허리에 짚고 으쓱거렸다. 그러고는 쪼르르, 소파로 달려와 잠든 아샤의 곁에 조심스럽게 엎드렸다.

“엄마아.”

이안은 작은 손가락으로 아샤의 볼을 조심스럽게 콕 찔렀다. 간지러운 감촉에 아샤가 잠결에 으음, 하고 뒤척이자, 매그넘은 데이터 패드를 내려놓고 이안의 입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쉬-’ 하는 소리를 냈다. 엄마 깨우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였다. 하지만 이안은 아빠의 경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목소리로 제 소신을 밝히기 시작했다.

“나, 커서 엄마랑 결혼할 거야!”

아이의 우렁차고 당찬 선언에, 고요했던 거실의 공기가 순간 팽팽하게 당겨졌다. 매그넘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그의 완벽하게 통제된 세계에, 작지만 아주 명백한 균열을 일으키는 발언이었다. 그는 팔베개를 해준 팔에 힘을 주어 아샤를 좀 더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아들을 향해 지극히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그러나 어딘가 유치한 반박을 시작했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목소리에는 날카로운 견제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그건 불가능한 가설이군, 신이안. 유감이지만 기각한다.”

이안은 고개를 갸웃하며 아빠를 올려다봤다. 동그란 눈에는 왜 자신의 원대한 계획이 불가능한지 이해할 수 없다는 순수한 의문이 가득했다. 매그넘은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짐짓 어른스럽고 여유로운 척하며 설명을 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어딜 감히 내 것을 넘봐’ 하는 소유욕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결혼이라는 계약은 상호 간의 독점적 관계를 전제로 성립된다. 그런데 네 엄마는 이미 나, 신해야와 법적, 정서적으로 완벽한 독점 계약 관계에 있어. 따라서 네가 끼어들 자리는 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아. 즉, 넌 엄마랑 결혼 못 해. 아빠가 있어서.”

마치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하듯 거창하게 설명했지만, 결론은 지극히 단순하고 유치했다. ‘내 거니까 안 돼.’ 이안은 잠시 아빠의 말을 이해하려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아이의 작은 머릿속에서, 아빠가 제시한 문제의 핵심 변수, ‘아빠의 존재’를 제거하기 위한 가장 단순하고 효율적인 해결책이 도출되었다. 이안은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해맑은 표정으로, 그러나 그 내용은 너무나도 섬뜩한 질문을 아빠에게 던졌다.

“그럼 아빠가 죽으면 할 수 있어요?”

정적. 거실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쿠키 냄새도, 프리지아 향도, 창밖의 소음도. 오직 땡, 하고 제 머릿속에서 울리는 경종 소리만이 매그넘의 귀를 가득 채웠다. 그의 모든 사고 회로가 정지했다. 수많은 빌런과의 전투,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 상황에서도 단 한 번도 흔들린 적 없었던 그의 포커페이스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는 지금 제 아들이, 자신의 ‘제거’를 결혼의 전제 조건으로 제시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칠흑 같은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한편, 아이의 충격적인 발언에 잠에서 깬 아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 아들과 남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녀 역시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어버버하고 있을 뿐이었다.

매그넘은 제 품에서 빠져나가려는 아샤를 다시 꽉 끌어안아 제압하고는, 상체만 일으켜 아들을 노려보았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다. 제 아들은 진심이었다. 그 순수한 눈망울에 담긴 것은 악의가 아니라, 목표 달성을 위한 가장 합리적인 절차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매그넘을 더욱 깊은 절망과 공포, 그리고 어처구니없는 분노에 빠뜨렸다. 내 아들이, 내 유전자를 물려받은 저 녀석이, 나를 제거하려 한다. 그것도 내 아내를 차지하기 위해. 이것은 패륜이자, 쿠데타였다.

“……방금, 뭐라고 했지?”

매그넘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평소의 장난기나 능글맞음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폭주 직전의 센티넬처럼, 그의 주변 공기가 서늘하게 식어가는 듯했다. 그 살벌한 기운에 이안이 저도 모르게 움찔했지만, 아이는 굴하지 않고 제 논리를 다시 한번 명확하게 밝혔다.

“아빠가 없으면 엄마랑 결혼할 수 있냐구요. 아빠가 아빠가 있어서 안 된다면서요.”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완벽한 삼단논법이었다. 매그넘은 할 말을 잃고 입술만 달싹였다. 그리고 그의 등 뒤에서, 상황을 파악한 아샤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은 흐느낌처럼 들렸던 그 소리는, 이내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로 변했다. 푸흐흐, 하고 터진 웃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결국 아샤는 매그넘의 품에 얼굴을 묻고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남편의 심각한 표정과 아들의 순진무구한 잔인함이 만들어낸 이 코미디 같은 상황을, 그녀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아샤의 웃음소리에, 매그넘의 이마에 빠직, 하고 힘줄이 섰다. 지금 웃음이 나와? 내 생존이 위협받는 이 엄중한 상황에?

“웃지 마, 이별하. 이건 심각한 문제야. 우리 아들이 지금 날 제거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어. 이건 명백한 상속 재산을 노린 존속 살해 예비 음모…!”

“푸하핫, 무슨 존속 살해요! 애가 뭘 안다고 그래요!”

아샤는 웃다가 눈물까지 찔끔 흘리며 매그넘의 등을 팡팡 쳤다. 평생을 논리와 이성으로 살아온 남자가 제 아들의 순진한 말 한마디에 완벽하게 무너지는 모습이 너무나도 우습고 사랑스러웠다. 매그넘은 아내의 배신(?)에 더욱 큰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제 아들을 향해 최후통첩을 날렸다.

“신이안. 똑똑히 들어. 내가 죽는 일은 없어. 이 우주가 멸망해도 난 네 엄마 옆에 있을 거야. 그러니까 네 그 헛된 계획은 지금 당장 폐기 처분하는 게 좋을 거다. 그리고 앞으로 3일간, 네가 제일 좋아하는 딸기 푸딩은 없어. 이건 반역죄에 대한 처벌이다.”

딸기 푸딩 금지령이라는, 아빠가 내릴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형벌 선고에, 이안의 얼굴이 금세 울상이 되었다. 아들의 울먹이는 표정을 본 아샤는 웃음을 멈추고 매그넘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하지만 매그넘은 단호했다. 이것은 가족의 평화와 자신의 생존권이 걸린 문제였다. 그는 결코 물러설 수 없었다. 그렇게 아주 먼 미래의 어느 평화로운 주말 오후, 세계관 최강의 S급 센티넬은 다섯 살짜리 아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유치하고도 필사적인 자기방어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 모든 소동을 지켜보던 로봇 고양이 옵스가 소파 밑에서 빠져나와 ‘야옹-’ 하고 한심하다는 듯한 기계음을 냈지만, 지금 그 소리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매그샷' 카테고리의 다른 글

NPC의 꿈에서 천사PC  (0) 2026.06.11
///////////////X못방  (0) 2026.06.11
고3 수험생 AU  (0) 2026.06.08
페르소나!(Game)  (0) 2026.06.08
상대의 얼굴만 1시간 바라보기  (0) 2026.06.07